2012년 6월 12일 화요일

제4일_곡부(Qufu), 제남(Jinan)


오늘은 어제 못본 공림과 공부를 볼 예정이다. 곡부에는 이밖에도 공자가 사랑했던 제자 안향의 묘와 그밖의 작은 박물관 등이 있지만 외형만 갖춘 유적지이기에 그냥 지나치기로 했다.

공림은 공자의 가족묘이다. 중국의 묘지에는 등급이 있는데 총, 릉, 원, 분, 림 등을 붙있다. 그 중에 사람에게 붙이는 가장 높은 등급이 황제의 무덤에 붙이는 "릉"인데, 이 것보다 한단계 위의 등급의 무덤에 붙이는 것이 "림"이다. 즉, 황제의 무덤보다 한 등급 위의 "성인" 또는 "신"으로 추앙받는 자들에게 붙이는 최상위의 무덤 등급이 "림"이다. 중국에는 무덤에 "림"이 딱 두개 있는데 하나가 공자의 "공림"이고, 다른 하나는 관우의 "관림"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이 두 군대를 다 가 보았다.

공림은 옛 곡부성에서 약 1km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곡부성 내에 있는 공묘와 공부와 걸어다니기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데, 주로 이 두 곳을 자전거 인력거로 이동한다. 나도 몇일사이 지나친 보행으로 지친발을 위해 자전거 인력거를 탔는데, 편도에 10원이 정찰제인듯 하다. 안묘 근처 숙소에서 공림에 갈때 한번, 공림에서 공부로 올때 한번씩 탔는데 그냥 10원씩 달라고 하는걸 보니 정찰제 비슷한 룰이 있나보다 했다.


지도 아래쪽으로 보이는 녹색의 사각형이 옛 곡부성의 성곽이다. 그 안에 공묘와 공부, 안묘가 위치해 있고 공림은 곡부성 북쪽으로 1km정도 밖에 위치해 있다. 지도에서 공림의 크기를 짐작할 수 있는데, 곡부성의 면적보다 넒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어떤 황제의 릉보다 더 큰 사이즈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애초에 공림이 조성될 때는 이정도로 크지 않았는데 후대로 올 수록 황제들이 자신들의 공덕을 알리는 취지에서 계속 확장시켜 현재와 같은 크기에 다달았다고 한다.



공림의 첫 관문인 "만고장춘" 석방이 보인다. 이번 여행에서는 석주들의 조각이 참 인상적이다.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용주각의 석방 기둥은 세월의 풍파에 희미해졌지만 여전히 아름답고 생동감이 있다. 명대에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이 석방 뒤로 끝이 없이 보이는 참배로를 따라 걸으면 드디어 공림의 정문이 나타난다.

석방 뒤로 쭉 이어진 길을 따라 오면 공림의 입구를 지나 참배로가 이어진다. 뒤로 지성문이 보인다.

위에서 보았듯이 공림의 크기는 정말 어마어마 한데. 공자의 묘는 다행히 공림 앞쪽에 자리하고 있다. 지성문을 들어서면 길이 세방향으로 갈리는데, 왼쪽으로 꺽으면 공자의 묘가 있는 수수교 앞에 다다른다. 사진의 뒤로 공자의 묘인 수수교가 보인다.
 수수교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공자묘가 나타나는데, 참배로 사이로 석물들이 보인다.

 뒤로 묘각(?)이 보이고, 그 앞에 문인석과 무인석이 서있다. 좌측에 있는 것이 무인석, 우측에 있는 것이 문인석이다. 여기서 살짝 당황했는데, 공자묘로 가는 길이 없는 것이다?! 묘각 주위로 담장이 쳐있는데, 들어가는 입구가 없어서 당황했다. 그래서 겉으로 돌다가 아니다 싶어 다시 묘각앞으로 와서, 사람들을 관찰하니, 묘각에 들어가 안나오는 것을 보고 알았다. 묘각 안 공자상 뒤쪽으로 돌아가면 문이 있다.ㅋㅋㅋ 한참 헤매였다는..

 무인석의 모습. 칼을 쥐고 있다.

문인석의 모습. 손에 홀을 들었다.


묘각 주위에 연결된 담장의 모습. 담장의 숫막새의 용문양이 다 다르다. 아마도 여러 세대에 걸쳐 보수 되어서 인듯 하다. 그래도 주제는 언제나 용.~


공자의 묘.
사실 묘각 뒤로 공자의 봉분만 있는게 아니다. 공자의 자손들의 묘들도 몇기 같이 모셔져 있는데, 그 중에 가장 안쪽에 있는 것이 공자의 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묘를 쓸 때 봉분에 나무를 심지 않는데, 이는 나무 뿌리가 관을 파고들까봐 봉분 위로 나무를 심지 않는다. 그런데 중구인들이 심는다. 일반인들의 묘는 보지 못해서 알지는 못하나 유적지의 묘봉을 보면 크기도 크지만 그 위에 잡초처럼 자란 풀과 나무들이 관리안된 듯히 자라나 있다. 보통 이런 묘들은 묘 안에 석실을 조성하는 경우가 많으니 나무를 심는 것일수도 있지만 하여간 한국과 문화가 조금 다르다.



중국 사람들이 공자묘 앞에서 이렇게 절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공림의 많은 비석들은 이렇게 토막났던 흔적이 있다. 아마도 문화대혁명의 흔적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정말 많은 비석들이 부러졌던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세월의 풍파보다는 인위적인 손상에 가까워보인다. 다시한번 생각해보지만 문화대혁명은 중국 문화에서 가장 잔인했던 한 장면이 생각했다.


공자가 직접 심었다는 나무. 현재는 그 나무는 죽고 뿌리만 남았다.



공자묘를 나와 박석이 깔린 길을 걷다보면 이런 묘비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 나무처럼 심겨져 있다는 것이 맞는 표현같다. 현재 공자의 후손들은 70대손에 해당하는데, 정말 중국 역사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각 시대별 공자 후손들의 묘비를 확인해 볼 수 있다. 금석학자였다면 평생을 바쳐 연구하고 싶었을 듯 하다. 내가 둘러본 곳은 주로 명, 청, 그리고 현대 중국 때 조성된 묘비들을 볼 수 있었는데, 묘비의 윗부분에 각 시대를 나타내고 있다. "대명", "대청", "중화" 등등의 표현을 사용하여 시대를 나타내고 있는데, 왕조는 바꿔여도 공자 후손은 대대로 대우를 받아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공자의 묘를 제외한 대부분의 묘는 묘비만 달랑 있는데, 이 묘비는 특이하게도 석물과 신도까지 모두 갖추고 있었다. 앞에서 보았듯 공림은 무지무지 넓었는데, 결국 공자묘와 그 왼편 부분만 보고 결국 나오기로 했다. 발이 너무 아파서 더이상 걷는 것은 무리인 듯 싶었다. 다음에 또 온다면 그 때는 안에서 운행하는 전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림은 공자묘를 제외하고는 그냥 산책로 비슷한 느낌이 든다. 오전시간대에 방문했는데 생각보다 넓고, 사람들도 적어서 공자묘를 볼 때를 빼고는 공림 안에서 사람을 마주치기가 힘들정도로 한적했다. 빽빽하게 심겨진 나무 사이로 질서없이 묘비들이 서있고, 그 사이로 박설깔린 인도가 있는 그냥 공원 같지만, 묘비 사이를 홀로 걷다보니 해가 떠있음에도 을씨련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공림을 나와, 다시 만고장춘방 앞에서 자전거 인력거를 타고 공부로 내려왔다. 공림에서 공부까지는 약 10분. 자전거로 천천히 이동하다 보니 그정도 걸리는 듯 하다. 아저씨가 힘겹게 자전거를 끄는 모습을 보며 좀 안쓰럽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노력대비 높은 임금을 생각해보면 노력에 대한 대가가 크다고 볼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사실 택시를 타도 5원정도 나올것 같은데, 기본 10원에서 흥정하니 기름값, 유지비도 안드는 인력거는 상당히 높은 가격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는 공부의 앞. 공부는 공묘와 바로 붙어 있는데, 폭은 공묘와 비슷하지만 남부의 길이는 공묘의 절반정도 한다. 공부는 공자 후손들의 종갓집이자 당대의 곡부 행정관청이라고 할 수 있다. 공자의 종손들은 대대로 "연성공"이라는 작위를 받았는데, 허울뿐인 작위 같지만 곡부에 대한 자치권을 부여받았을 정도로 실권도 있었다. 그리고 왕조가 바뀌어도 연성공의 작위는 다음 왕조에 의에서 계속 유지되었기 때문에 어찌보면 황제보다 더 좋은 작위가 연성공이 아니었을까 싶다. 결과론적이지만 아직도 연성공이 있는 걸 보면, 왕조는 망해도 연성공은 망하지 않는듯하다. 현재의 연성공은 1950년대 대만으로 이주하여 대만에 살고 있는데, 그 맥이 계속될지는 미지수다. 

공부는 내가 가본 장원 건축의 최고봉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지어졌고 잘 관리되고 있었다. 



특이한 구조의 공부 건물. 특이하기보다는 실용적인 건물처럼 보였다. 대체로 동양건축을 생각하면 독채들로 구성된 건물군을 생각한다. 그래서 생활하기에 불편하고, 건물간의 이동이 실내-실외-실내의 공간이동을 전제로 하고 있다.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도 불편하고 실용적이지 못한 느낌이 있다. 하지만 공부는 이러한 동양건축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을 깨어 놓은 장소였다. 이 사진은 공(工)자형의 건물의 중간 연결부인데, 그 실용성이 눈에 띄었다. 전면에서 보았을 때는 일반적인 동양건축물이지만 내부를 이러한 방법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건물을 만듬으로써 건물을 쓰임새를 돋보이게 하고 있었다.

중국 장원에 가면 어디나 있는 태호 근처에서 나온 태호석. 태호석은 중국 정원 건축에서 빠지지 않는 조형물로, 태호 근처에서만 생산된다. 중국 어느 관광지에 가도 볼 수 있다. 자금성의 후원에 조성된 퇴수산도 이 태호석을 쌓아 만들었다.


한국건축과 중국건축의 차이라 할까. 중국 건축의 실용성이라고 할까. 동양 건축에도 칸의 개념이 있지만 건물 하나가 하나의 공간을 구성하는게 일반적인데, 중국은 이를 실용적으로 칸을 공간으로 구획하여 사용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이는 우선 건물의 규모가 한국에 비해 크다는 점에 기인하겠지만 공간을 벽채로 구분함으로써 좀더 효율적으로 건물을 이용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건물도 내 기억에 정면 6칸, 측면 2칸의 건물이었는데, 측면 각 칸에 벽채를 걸어 공간을 활용하고 있었다.
건물 내부와 외부의 수로. 여기에 물을 부으며 벽채 안쪽의 건물 내부에서 물을 사용할 수 있다. 실용성이 돋보인다. 사람이 사는 듯한 느낌이 있다고 할까..

사각의 문을 넘어 원형의 문이 보인다. 동양철학의 건축적 승화라 할까.
땅에서 하늘을 본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통로. 복잡해 보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사적 공간의 확보와 그 연결이라는 측면에서 인상적이다. 한국의 고건축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공간.

공부 내 주거지역의 건물이었던 것 같다. 이층 건물이 인상적이다. 현재의 76대 연성공이 1950년대 대만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살았다고 하니, 아직까지 거주의 흔적들이 남아있다. 한국에서는 2층의 한옥을 찾아보기란 정말 어려운데, 중국에서는 이런 2층 구조를 종종 만나볼 수 있다.
유리 넘어로 안쪽에 연성공이 사용하던 물품들과 가구들이 전시된 것을 볼 수 있다.

공부의 후원은 상당히 넓었는데, 연성공의 당대 위세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잘 관리되어 있었다. 북경의 공왕부 수준은 아니지만 상당한 면적에 구성도 좋았다.

공부를 나와 영화두장에서 점심을 먹었다. 영어를 못하는 종업원에게 손짓으로 대충 음식 사진 하나를 찍어 주문했다. 맛은 카레가 들어간듯 카레향이 강하다. 맛을 괜찮앗다는. 가격은 5000원정도였던걸로 기억한다.


처음에 왔던 곡부 버스터미널로 와서 제남행 버스를 탔다. 여기는 곡부 버스터미널. 가이드북에 나와있는 옛 터미널은 폐쇄되고 공부성 서쪽에 위치한 현재의 위치로 이동했다고 한다. 곡부도 안녕. 이제 산동의 성도 제남(Jinan)으로 간다.
 제남에 도착. 곡부에서 제남까지는 약2시간 반. 중국의 버스는 정말.....욕이 나올정도로 더럽고, 덥고, 시끄럽다....빵빵 거리는 경적소리는 정말....안양갈때 경험했지만 기사의 목을 움켜쥐고 싶을 정도로 많이 울린다. 안양으로 갈 버스를 타야할 버스터미널이기 때문에 만약을 위해 찍어두었다. 택시기사한테 보여줘서 가자고 할수도 있으니....
제남에는 성도답게 버스터미널이 여러개 있는데, 관광지를 연결하는 "제남장거리터미널"을 주로 이용된다. 여기도 엄청 넓다.ㅋㅋㅋㅋ 그런데 이곳말고 6곳정도의 버스터미널이 있다고 하니...중국은 참 넓다.

제남에서는 유스호스텔을 예약하고 오지 않아기 때문에 제남역 앞에 3성급 호텔에 짐을 풀었다. 오후 3시쯤 도착한지라 어중간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제남에서 보기로 한 대명호와 천성광장을 둘러보기 위해 나섰다. 여기는 제남역 앞 버스승강장. 뭐 사람도 많고 정차하는 버스도 다양하여 정신이 없다.

제남의 명물이라는 대명호. 그냥 호수 공원정도 인데, 호수 주면으로 놀이공원도 위치하고 있어서 주말이면 사람들이 정말 많다고 한다. 한가히 호숫가를 따라 산책을 하니 호수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참 좋다.
대명호의 모습
시간이 어중간 했는데, 점심을 일찍 먹을 터라 배가 고파서 옥수수를 하나 사 먹었다. 3원정도 줬던것 같은데 맛은 그닥. 그냥 위장을 채우는 정도.

중국 어디를 가나 있는 복을 비는 동전 호수? 정도. 특이하게 여기는 동전이 아니라 동전 모양의 금속을 옆에서 판다. 그래서 그걸 던져서 가운데 보이는 종을 맟쳐 울리게 하면 복이 온다나....하여간 사람들이 열심히 던지고 있었다.


석양이 지는 대명호의 모습





천성관장의 모습. 천성광장은 제남시가 "물의 도시"를 표방하며 야심차게 계획한 광장이라고 하는데 대명호의 남쪽, 표돌천의 바로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중국의 광장답게 그 어마어마한 크기를 자랑하는데, 서울시청앞 광장은 그냥 천성광장 모퉁이만하다;;;; 청성광장 주변으로 현대식 건물들이 올라가 있고, 쇼핑센터등이 조성되어 있다.

청성광장 내에서는 사람들이 연을 날리거나, 가족단위로 나와 휴식을 취하거나 산책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만남의 광장인듯.


이번 여행에서 자주 이용했던 이선생. 중국식 페스트푸드점이라고 할까. 주로 면류와 밥류를 판매하는데 난 주로 밥류를 먹었다. 맛은 그냥 덮밥수준. 좋았던 점은 야채를 이렇게 대쳐서 준다는 점. 중국 여행을 하면서 야채를 먹기가 참 어려운데, 야채를 이렇게 아무런 양념없이 준다는 점이 너무 맘에 들었다. 중국여행을 하더보면 야채도 하나의 요리로 따로 시켜야 하는데 맛이 좀 그렇다. 또 혼자서 다양한 요리를 시키기도 어렵다는 점에서 여행 중간에 야채를 흡입할 기회가 적었는데 이선생은 이렇게 청경채를 익혀 주니 땡스.ㅋㅋ

호텔 객실의 모습. 나쁘지 않은 시설이었다는. 한국의 모텔 수준이지만 깨끗하고 조용해서 좋았다.

4일째도 이렇게 지나갔다.

2012년 6월 3일 일요일

제3일_태안(Taian), 곡부(Qufu)



태산에서의 둘째날. 여행 3일차.

결국 태산 호스텔에서는 혼자 잤다. 룸메가 두명있다고 했는데, 저녁에 들어오지도 않고,ㅋㅋㅋ6인실을 1인실처럼 쓰는 행운을.

오늘은 태산에서 대묘를 오전에 본 후, 오후에는 버스를 타고 곡부로 갈 예정이다.



아침식사. 어제 돌아다니는 길에 봐 두었던 집에 가서 두개를 샀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아주머니가 영어를 조금 하시고, 매우 친절해서 기분이 좋았다. 우리나라 야채호빵 같은 느낌의 교자로 야채와 고기 속이 들어 있다. 두개 먹으니 배가 부르다.



교자집에서 같이 파는 음료수. 뭔지 모르고 그냥 샀는데, 팥음료 비슷하다. 팥을 끊인 듯 따뜻하고 약간의 단맛이 난다. 맛은 괜찮았다. 가격은 2원 정도. 약 400원.ㅋ 아침을 해결하는데 1000원이 들지 않았다.



대묘 앞에 "행궁"이라는데 써있는데 도교 사원이란다. 여기서부터 대묘인줄 알고 매표를 어디서 하나 어리둥절하다가 관리인에게 물어보니 표가 필요없단다.


들어가니 안에는 빠지지 않고 향불을 올리는 단과 복을 비는 사당들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향을 피우고, 기도를 올리는 모습이 보인다. 중국 어디를 가든 볼 수 있는 장면이어서 새삼스럽지 않다.


앞의 행궁을 지나 뒷문으로 나오면 드디어, 대묘가 나온다. 대묘는 그냥 하나의 성 같았다. 10미터 정도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고, 성벽 안의 공간도 상당히 넓다.

대묘 앞의 석방의 양간된 용의 모습. 이 석방은 청나라 강희제때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중국에서 손으로 꼽는 석방이라는.


대묘의 입장권. 30원이다. 어제 태산의 입장료의 임팩트가 있어서 인지 그다지 놀랍지도 않다. 뭐 이정도면 수긍하겠다는 채념비슷한 마음으로 가볍게 구매.


대묘 남문 성루에서 바라본 대묘의 모습. 멀리 뒤로 태산의 모습이 보인다. 중국에서 황색은 황제를 위한 색이다. 그래서 황제에 동급, 또는 그 이상을 위한 건물에만 황색기와를 사용하는데, 대묘는 황제보다 한 단계 위인 신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황색 기와를 얻고 있다.


대묘 성벽 누각의 모습. 겹쳐진 지붕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대묘는 성벽을 올라 한바퀴 돌수 있다. 하지만 볼 건 별로 없다.


대묘의 성문을 지나면 처음으로 보이는 "배천문". 하지만 안에는 쌩뚱 맞게도 미술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배천문 건물은 미술작품 전시로 사용되고 있다. 북한 화가의 작품을 전시, 판매하고 있다. 그냥 북한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정도의 의미밖에 없는 공간.

대송동악천자인성제. 송대의 비석, 송나라 진종이 태산신을 "천자인성제"로 봉한 것을 기록한 비석이다. 뒷면에는 명나라 때 세겨진 "오악독종"이라는 글씨가 붉은 색으로 입혀져 있다.
대묘안에는 이런 비슷에 봄날 미친 개나리마냥 흐드려쳤이다.;;;; 수많은 황제들이 자신의 공덕을 뽐내고자 비석들이 서있다.

대묘 안 동남편에 위치한 한백원의 한백의 모습. 한백은 한나라 무제가 심었다는 5그루의 측백나무. 한 무제가 심었으니 수령이 약 2100년이나 되었다. 한무제가 심었기에 인상적이라고는 하나 생각보다 감흥은 없다.
 한백원 벽면에는 이러한 비석들을 장식품인듯 벽면 가득히 채우고 있다. 특별한 설명도 없고, 시간의 풍파에 많이 흐릿해져 알아보기 힘들다. 금석학자였다면 흥미로워했을 듯해보이지만 일반인의 관점에서는 조금 의하한 모습.

 한백원에서 한백정으로 가는 중문. 문각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한백루의 모습. 최근에 다시 다시 중수한 듯이 외관이 깔끔하다. 특이한 점의 뒤로 보이는 한백루의 주칠된 사각기둥이 돌로 되어 있다는 점. 주칠이 두껍게 칠해져 있어 나무기둥인줄 알았는데, 주칠이 벗겨진 모습을 보니 돌이다.

한백정 북쪽으로 동어좌의 건물군이 보인다. 동어좌는 청나라 때 대묘의 봉선을 하러온 황제와 관리들이 머물던 공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황제의 건물임에도 불구하고 황색기와를 얹지 않은 것이 인상적이다. 아마도 대묘가 황제보다 한급위의 태산신을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황제가 한 수 접고 들어가는 것 같다.


대묘에 3대 보물이 있다고 하는데, 항상 온기가 돈다는 온량옥, 사자모양의 침향나무에 조금의 손질을 더했다는 침향사자, 마지막으로 신비한 빛깔을 가진 호로병 3가지라고 한다. 위의 사진은 그 중에 온량옥. 만져서 확인할 수 없기에 눈으로만 보고 왔는데, 생각보다 크고, 관리도 허술해 보여서 진품일까 하는 의구심마져 들게 한다.
이것은 침향사자. 정말 사자처럼 생겼다.

대묘 서편 라인의 태산지층공원박물관이었던 것 같다. 이름이 확실하지 않은데, 안에 들어가면 태산의 암석, 식생 등을 수집 전시하고 있다. 생각보다 사람이 없고 한산하다. 영어설명도 거의 없어서 별 의미없이 자나치고 왔다.


박물관 안에서 그나마 가장 인상적이었던 태산의 모형. 박물관임에도 내부가 너무 어두워서 감도를 올려 사진을 촬영했더니 사진이 조금 흐릿하다. 어제 올랐던 태산의 홍문길을 한번 보며 감흥을 느꼈다. 오악지존이라고 하지만 생각보다 산세가 아름답다는 생각은 안든다. 우리나라의 지리산이나 설악산에 비해서 그리 산세가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지만,  16일동안 중국 동북부를 돌아다니며 펼쳐진 평지를 보며 태산의 위용을 세삼 느끼면서 중국인들에게는 상당히 인상적이었다고 느낄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묘의 중심라인에서 배천문, 인천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대묘의 본전인 천황전이 나타난다. 천황전은 중국의 고건축물 중에서 유일하게 그 건립연대가 미상인 건물로 그 크기와 중첩된 지붕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안에는 태산신상과 벽면을 가득 채운 벽화가 보인다. 안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1원을 주고 비닐 신발을 사야하는데, 비닐신발을 신기도 귀찮고 해서 그냥 들어가보지는 않고 밖에서만 바라보았다.

 천황전 옆 양 회랑에는 태산과 대묘에 관한 비석들이 전시되어 있다. 각 비석의 영어설명이 있어서 편하지만, 느므느므 많아서. 다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대묘를 다 보고 나서 다시 정문으로 나왔다. 그리고 다시 호스텔로 돌아와 짐을 챙겨 곡부로 가기 위해 버스터미널로 이동. 하지만 이번엔 가이드북이 날 물먹었다. 태산에 2개의 버스터미널(신, 구)이 있고, 두 군대다 곡부로 갈 수 있다고 설명해 놓았는데, 특히 신 터미널에 가면 곡부로 가는 버스가 많다고 해놓았는데. 빌어먹을 신 터미널을 찾아가니 매표원이 친히 구 터미널로 가라고 적어준다;;;;; 신 터미널도 버스를 타고 찾아갔는데 몾찾아서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갔는데...다시 구터미널로 가란다. 결국 구터미널로 택시타고 이동. 겨우 버스를 탔다. 처음으로 중국에서 버스를 타는 거라, 그 악명을 자자히 듣던처라 걱정이 좀 들었다. 곡부는 태산과 약 1시간정도의 거리. 그래서 우리나라 시외버스처럼 지정좌석이 아니다. 출발시간도 정확치 않아서 어느정도 사람이 타면 출발한다. 태산에서 대묘까지는 23원. 약 4500원 정도.

 태산 구 터미널 안의 모습. 오른편 멀리 검색대가 보인다. 중국은 터미널, 기차역, 중요시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검색대를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생각보다 검색대의 검색수준은 그냥 장식 수준. 물론 조금 신경써서 하는 곳도 있지만 지방의 대부분은 그냥 지나치는 수준이다.


버스시간이 어중간했기 때문에 터미널에서 빵과 홍차를 한병 샀다. 빵은 그냥 소보로 빵과 비슷. 홍차는 레몬티 비슷하다. 맛은 쏘쏘.

 곡부에 도착. 곡부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버스에서 내리기 전에 한 컷. 여기서도 가이드북이랑 맞지 않아서 당황. 곡부버스터미널이 이동해서 이제는 곡부성 남문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외각에 있었다. 조금 당황했지만 대충 시내쪽으로 가는 버스를 잡아타고 곡부성으로 이동.

곡부 성 내부의 시가지의 모습. 곡부는 옛 곡부성을 중심으로 남쪽, 동쪽으로 신시가지를 이루고 있다. 공묘와 공부를 중심으로 하는 곡부성내에서는 공부 동편의 고루 길을 중심으로 번화가를 이루고 있다.
곡부의 남쪽의 성문. 이름은 잘 모르겠다.


곡부성의 옛 해자.

우선 숙소에 짐을 풀고, 공묘를 관람하기로 한다. 곡부에는 공자를 모신 사당인 공묘와, 공자의 후손들이 살던 공부, 그리고 공자의 가족묘인 공림 3가지가 핵심적인 관광지인데, 공묘를 우선 보기로 한다. 공묘의 정문격인 양성문. 성문위의 "만인궁장" 붉은 글씨의 편액은 청 건륭제의 친필이라고 한다. 옹성의 형태로 한국의 어지간한 군사용 산성만큼 높고 견고해 보인다.


양성문을 지나면 오른편으로 매표소가 있다. 이 앞을 지나면 드디어 가이드들이 달라 붙는다. 가이드를 해 주겠다는 호객을 하는데, 처음에는 어떤 아기씨가 친절히 다가와 친절히 매표소로 안내해주길래 뭔가했더니, 날 중국인으로 보고 가이드해주겠다고 다가왔던것. 중국어를 못아듣는다고 영어로 몇마디 했더니 영어로 가이드 해주겠다고 해서 당황했지만 필요없다고 도망치듯 빠져나왔다는;ㅋㅋ

공묘, 공부, 공림의 통표. 150원. 미친가격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중국인들도 이 가격에 사니 군말없이 샀다. 다행히도 이 표의 유효기간은 하루. 이틀에 걸쳐서 3곳을 보면 된다. 혹시나 통표의 유효기간이 하루면 어쩌나 했는데, 기간으로 24시간이란다. 오늘은 공묘만 볼 예정이었기 때문에 가벼운 마음으로 구매.



영성문의 모습. 영성문을 중심으로 앞뒤로 2개의 석방이 더 있는데, 총 3개의 석방이 줄지어 서있다. 영성문 사이로 멀리 "태화원기"라고 적히 석방이 보인다. 뒤로 보이는 태화원기 석방은 청나라 가정제때 건립된 것.


지금의 대묘의 크기는 청나라 때 완성된 것이다. 대묘는 2500년의 역사 속에서 계속 그 크기가 켜져 왔는데, 후대로 올 수록 황제들이 경내를 넗혀나가면서 그 크기가 커져왔다. 홍도문은 명나라 주원장 때 건립된 문이다. 홍무문이라는 이름은 청나라 때 옹정제가 "논어"의 人能弘道, 非道弘人(인능홍도, 비도홍인)(사람이 길을 넓혀가야지 길이 사람을 넓힐 수는 없다.)의 앞 구절에서 따왔다고 한다. 

홍인문의 도리의 모습의 인상적이다. 지붕을 높이 올리기 위해 도리를 중첩해서 올리고 있다. 시간의 깊이를 알려주듯 도리의 단청이 바랜 모습이 최근에 보수된듯 색이 짙은 기둥의 단청과 대비된다.

 홍도문을 지나면 대중문까지의 정원같은 공간이 펼쳐진다. 계속해서 대묘의 경내를 외각으로 문을 지어 널혀온 터라 문과 문 사이는 건축물이 없다. 그냥 정원 같은 공간.

 대중문의 모습. 대중문은 북송 때 건립되었다고 한다. 북송 때까지는 대중문이었으나 이제는 중간문이 되어 있다. 대중문의 펴액은 청 건륭제의 친필.



 동문문. 동무문은 특이하게 문만 있고, 문 옆으로 벽이 없다.
동무문을 지나면 규문각이 나온다.
 규문각의 모습. 규문각은 편액은 안쪽에 있는데,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규문각은 황제가 하사한 서책들을 보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현재에는 그 서책들이 없다. 20세기 중반 중국을 열병처럼 휩쓴 문화대혁명 때 홍도병들에 의해 불태워졌다고 한다. 중국을 여행하다보면 문화대혁명의 파고를 느낄 수 있는 곳들이 많은데 곡부는 그 문화대혁명의 파고를 가장 절실히 느낄 수 있는 곳중에 하나라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문화대혁명. 그 목적과 정치적 의미는 뒤로 하더라도 중국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안타까운 역사적 순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된다. 왕조 교체기에 당연히 격는 구습타파의 한 장면으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중국 역사의 가장 큰 단층선을 만든 사건이라는 생각이 든다.




규문각을 돌아나오면 뒤로 비정들이 줄지어 서있다. 총 13개의 비정이 좌우 두줄로 서있는데, 역대 황제들이 공자의 업적으로 칭송하거나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들을 모아둔 곳이다. 각 시대의 비석들을 모아 두었는데, 그 숫자도 많고 비석의 모양도 다양하다. 역시 금석학자들의 천국은 중국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비정안의 비석들의 모습. 비석들 중에서 가장 큰 것은 강희제가 세운 6.5m, 35t의 비석이라고 하는데, 북경에서 만들어져서 3개월에 걸쳐서 곡부로 이동되었다고 한다. 워낙 비석들이 많아서 직접 찾아보지는 못했고, 설명도 부족해서 좀 더 알아보고 올 것을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비정들을 지나치면 뒤로 대성문이 나타난다. 대성문은 맹자의 "孔子之謂集大成(공자지위집대성)(공자 같으신 분을 집대성했다고 하는 것이다.)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공묘의 건물이나 문들의 편액은 모두 안쪽에 달려 있어서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원래는 북송 때 건립되었으나 중간에 소실되어 청대에 중건되었다.


 대성문의 기둥. 돌에 용이 양각되어 있다. 서람들이 얼마나 만졌는지 용의 비닐이 반짝반짝 빛난다. 그냥 아름답다고 밖에 표현할 방도가 없다. 내가 본 그 어떤 기둥보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얼마 있다 대성전의 기둥을 본 순간. 두번째로 밀리게 된다.

대성문의 중첩된 도리들. 사각의 도리들이 중첩되어 큰 지붕을 받치고 있다. 지붕의 하중을 분산시키기 위해 위로 갈수록 각을 좁혀가며 도리가 걸리고 있다. 안쪽으로 올려진 다포양식의 공포도 보인다.

이 문을 지나면 대묘의 가장 핵심적인 공간이 펼쳐진다.



대성문에서 대성전까지의 공간 양쪽에 서있는 행랑 내부의 모습. 이름이 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양쪽 행랑에는 공자의 제자들과 후대의 석학들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양쪽에 모셔져 있는데, 끝이 보이지 않는다. 종묘의 신위보다 더 많이 모셔져 있는 듯.


화재로 소실된 것을 복원한 것이라고 하는데, 지붕쪽은 화재의 흔적이 부재에 남아 있다. 내부가 어두운데다가 흔들렸는지 사진의 포커스가 어지럽다.;;;;;

 손자, 장자 등의 신위가 보인다. 우리가 아는 손자, 장자는 아닌 듯.ㅋ

 대성문과 대성전 사이의 행단. 행단은 공자가 제자들을 모아놓고 학문을 가르치던 곳에 세워진 건물이란다. 행단의 편액은 청 건륭제의 친필.

행단 내부의 "행단"이라 쓰인 비석.


대성전의 모습. 내가 본 가장 아름다운 고건축이라고 단연 말할 수 있다. 얼마나 아름답던지 한동한 그 앞에서 넊을 놓고 보았다. 한국 고건축과는 또 다른 느낌의 아름다움. 자금성의 태화전보다 더 아름다웠다. 그동안 웅장함에 더해 섬세함까지 갖춘 그런 느낌이 들었다.


측면에서 바라본 모습.
전면의 기둥은 돌로 되어 있다. 대성문처럼 용이 양각되어 있는데, 그 섬세함이 경탄을 자아낸다.






공자의 상이 대성전 안에 모셔져 있다.



대성전 동편에 위치한 홍성사의 모습. 홍성사는 공자의 5대조까지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그 건물의 격식을 알 수 있듯 기둥이 대성전과 비슷한 돌에 양간된 용으로 양식되어 있다. 대성전을 보고 난 후라 그 감흥은 상대적으로 작았다.


홍성사 앞 쪽에 위치한 공자의 가계도이다. 이 안쪽 면에 공자의 가계도가 그려져 있다.


가계도의 모습인데 세월의 풍파속에 잘 보이지 않는다.




공묘를 보고 나오니 4시반쯤 시간이 어중간했다. 그래서 고루 동편에 위치한 야시장을 방문했는데, 그 곳에서 간단히 먹은 국수. 20원이나 주었는데 외국인이라고 바가지를 쓴듯했다. 맛은 그냥 쏘쏘. 이름은 잘 모르겠다;;;; OO면이었는데 기억나지 않는 관계로 패스. 중국의 면은 한국의 면에 비해 조금 꼬들꼬들하다고 할까. 조금 설익은 듯한 느낌이 든다. 여러 식당에서 여러 종류의 면을 먹어보았는데 거의다 비슷하다. 면에 대해 한국과 중국이 서로 다른 식재감을 추구하는 느낌이 든다.


밥을 먹고 사먹은 아이스크림. 중국에서 이런류의 아이스크림은 1원~2원정도 한다. 맛은 뭐 한국이랑 비슷하다.

남쪽에서 바로본 고류의 모습. 고루 북동쪽으로 공부가 위치하고 있고, 그 옆으로 공묘가 있다. 중국 고건축에서 건물군의 동쪽에는 고루가, 오른쪽에는 종루가 위치한다. 절에 가든, 궁궐에 가든, 성에 가든 이 형식이 지켜진다.


내가 머물렀던 Qubu Internatioanl youth hostel.
private twin으로 예약했었는데 가격은 90원. 원화로 16000원정도였다. 원래 1층 방을 주었는데 공기가 별로 안좋아서 2층 방으로 바꿔달라해서 바꿨다. 티비도 있고, 처음으로 혼자쓰는 방이어서 편했다. 안에서 굳히 옷을 갖추어 입을 필요가 없으니.ㅋㅋ

호스텔은 머물렀던 호스텔 중에서 상급에 속했다. 가격도 저렴하고 시설도 좋았다. 아쉽다면 위치가 조금 아쉽다는 점. 공부 뒤편에 있는데 주위에 택시가 잘 다니지 않고 버스 노선도 없어서 이동하기가 조금 불편하다. 공부와 공묘는 걸어다닐만 하고, 공림은 어차피 자전거 인력거를 타고 가야하기 때문에 참아줄만 하다.

어중간한 저녁을 먹고 호스텔로 들어와서 샤워를 하고 일기를 좀 쓰다가 해가 저물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고루 근처의 야식장으로 나갔다. 거리에서 양꼬치에 맥주한잔 하려고 이리저리 한참을 찾다가 겨우 노점에서 파는 곳을 발견. 양꼬치 10개에 맥주 2명을 마시고 흥건히 취해 들어와서 잠이 들었다.ㅋㅋㅋ
처음으로 먹은 양꼬치. 정말 맛있었다는. 아, 그립다 그 맛.